85년 생입니다. 팬시점의 등장은 새로운 자본주의 세상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어수선한 문방구의 시대가 저물고, '취향'이라는 것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저에게 그 변화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로 올라가는 길목 문방구 옆에 처음 들어선 아트박스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문방구에 둘러싸여 자란 아이의 눈에 그 변화가 어떻게 비쳤는지,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문방구 다섯 개의 왕국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부산 해운대 해동초등학교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건, 학교 하나를 둘러싸고 문방구가 무려 다섯 개나 있었습니다. 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두 개, 옆 해운대 여중으로 가는 길에 하나, 그리고 초등학교 정문 앞에 두 개. 등하굣길 어디로 가도 문방구를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
85년 생입니다. 계는 은행이 멀던 시절 서민들이 만든 금융 시스템이자 정(情)으로 굴러가던 신뢰의 공동체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 문화가 어린 시절 저에게 가장 신기하면서도, 가장 아팠던 기억입니다. 저희 집이 직접 겪은 이야기와 함께 그 시절 계 문화를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품앗이에서 곗돈으로: 서민들의 금융 시스템 계의 뿌리는 품앗이에 있습니다. 모내기나 김장처럼 혼자서는 벅찬 일을 이웃과 노동력을 주고받으며 해결하던 상부상조의 정신이 돈의 형태로 바뀐 것이 바로 계입니다. 은행 문턱이 높고 대출이 어렵던 시절 그리고 사는 게 바빠서 아침에 출근하면 밤이 늦어서야 귀가 했던 그 시절, 서민들은 목돈이 필요할 때 이 방식에 기댔습니다.원리는 단순합니다. 열 명 남짓이 매달 일정..
1985년생입니다. 제가 보고 자란 1980~90년대는 6·25 전쟁의 상흔 ('다치거나 긁혀서 살갗에 남은 '상처의 흔적')을 딛고 일어나,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비로소 경제가 태동하고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다들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생업 전선에 뛰어드신 아버지와 가정을 돌보시던 어머니의 땀방울 속에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분명 더 나아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 역시 바퀴벌레와 꼽등이가 출몰하던 단칸방 월세에서 시작해 2층집 전세를 거쳐 23평 아파트에 닿기까지, 서로를 다독이며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우리 집도, 그리고 우리 사회도 점진적으로 풍족해지던 그야말로 역동적인 격변기였습니다. 제가 이 시절의 이야기를 굳이 기록하려는 것은 단순한 추억팔이 때문..
85년 생입니다. 우리 시절 국민학교는 무상교육이었다고는 하나 사실 아니었습니다. 매달 학교에 내야 하는 돈이 있었고, 그 돈은 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습니다. 1985년생인 저에게 그 선은 육성회비 봉투와 우유 급식이었습니다. 웃으며 쓰던 오락실과 문방구 이야기와 달리, 오늘은 조금 담담하게 그 시절 교실의 뒷면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매달 돌아오던 봉투: 육성회비라는 숙제 "엄마! 선생님이 육성회비 가져오래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육성회비', 정식 명칭이 육성회비인지 월사금인지는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고, 아이였던 저에게는 그냥 '매달 학교에 내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국민학교는 분명 의무교육이라 수업료가 없었는데, 학교 운영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학부모에게 걷는 육성회비가 사..
85년 생입니다.국민학교 앞 문방구는 그 시절 아이들의 백화점이자 놀이터였습니다. 준비물만 파는 곳이 아니라 간식과 게임, 그리고 동네 신용 시스템까지 굴러가던 아이들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1985년생인 저는 문방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했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등굣길에는 준비물을 사러, 하굣길에는 하루의 마무리와 간식을 위해 — 하루 2회 이상 꼬박꼬박 문방구로 출근했습니다. 출근 도장을 찍듯 드나들던 그 작은 가게의 기억을,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불량식품 천국: 쫀디기부터 순대 꼬치까지 그 시절 문방구에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간식들이 가득했습니다. 쫀디기, 월드컵, 어포, 똘똘이, 꺼벙이, 나나콘 —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이 과자들은 100원, 200원이면 살 수..
85년 생입니다. 90년대 컴퓨터 학원은 컴퓨터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컴퓨터를 향한 짝사랑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빌게이츠님이 멋진걸 만들었지만 내가 정작 배운 건 타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아이들에게 컴퓨터 학원은 미래로 통하는 문처럼 보였습니다. 1985년생인 저의 첫 컴퓨터, 첫 게임, 그리고 첫 디스켓 복사의 기억을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검은 화면에서 왕자가 튀어나왔다 컴퓨터를 처음 만진 건 국민학교 6학년, 친구 집에서였습니다. 친구가 정사각형 모양의 플로피 디스크를 넣고 검은 화면에 cd, dir 같은 알 수 없는 문자를 타닥타닥 치니, 갑자기 화면에 페르시아의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의 탄성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벽돌 성전을 달리고, 점프하고, ..
85년 생입니다. 저에게 동네 오락실은 단순한 게임장이 아니라 그 시절 아이들의 사회이자 해방구였습니다. 게임 실력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눈치와 처세를 배우던 곳이었고, 그 옆 좁디좁은 코인노래방은 노래와 연애, 그리고 첫 뽀뽀가 시작되던 장소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 용돈을 받으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도 오락실이었고, 동전이 떨어지면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며 누가 흘렸을지 모를 백원짜리를 찾아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합니다. 하필 이름도 '뽀뽀오락실'이었던 우리 동네 지하 오락실의 기억과 함께, 90년대 오락실 문화를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지하 계단 아래의 격투장: 스트리트파이터2와 철권 제 아지트는 동네 지하의 뽀뽀오락실이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 어둑한 공간에 게임기 불빛과 ..
85년 생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라디오 감성 세대입니다.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라디오 앞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누나는 방송국에 편지 사연을 보냈지만 한번도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화려한 댄스와 가사가 내 눈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이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단순한 인기 그룹이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분기점★입니다. 마치 아이폰이 우리의 실생활을 바꿔놓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의 10대 그리고 20대의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1992년 데뷔해 1996년 해체까지 활동 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K팝 시스템과 팬덤 문화가 모두 이 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5년생인 저에게 ..
85년 생입니다. 8090은 같아보이지만 80년대와 90년대는 사실 전혀 다른 시대였습니다. 80년대가 골목길과 동네 공동체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압구정 로데오로 상징되는 개인과 소비문화의 시대였는데요. 1985년생인 저는 80년대를 어린 시절의 배경으로, 90년대를 또렷한 본 기억으로 통과한 세대입니다. 국민학교를 입학했고 졸업은 초등학교였습니다. 이렇듯 두 시대를 걸쳐 산 사람의 눈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네 가지 영역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거리 풍경: 골목길에서 로데오거리로 80년대의 중심은 동네 골목이었습니다. 동네슈퍼, 이발소, 비디오방, 오락실이 걸어서 5분 거리에 모여 있었고, 한복 입은 할머니와 교복 입은 학생이 같은 골목을 걸었습니다. 이웃이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