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UTREE.RI · 개인 자료를 다시 쓰는 프로젝트
쌓아 둔 기록을,
다음 일을 위한 자산으로 바꾸는 실험
40대 직장인·육아 아빠가 사진·메모·자료를 세컨드 브레인에 모으고, 그 안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콘텐츠와 디지털 도구 실험으로 확장해 갑니다. 자동화·채널 운영·수익화는 결과를 약속하는 목표가 아니라, 직접 해 보며 배우고 기록하는 과정입니다.
현재 단계: 자료 정리와 세컨드 브레인 구축
저의 첫 일탈은 술도 담배도 아닌 '금 캐기'였습니다.요즘 세대가 말하는 거창한 일탈과는 거리가 멉니다.그저 늘 놀던 골목을 벗어나, 걸어서 한 시간 거리까지 나가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겐 세상 끝까지 가보는 모험이었습니다.그 모험의 세계로 저를 이끈 건 최현석이라는 친구였습니다.취미가 '돈'이었던 친구, 최현석우리 반에는 최현석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박학다식한 아이였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의 취미는 '돈'이었습니다.초등학생의 취미가 돈이라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습니다.저에게 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려준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우리의 첫 사업은 빈병 줍기였습니다.그리고 우리에게는 최고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해운대 바닷가입니다.그곳은 그야말로 노다지였습니다.특히 최고..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 냄새가사실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린 냄새였습니다.아버지가 검도복 만드는 일을 시작하시면서 우리 집의 공기가 바뀌었습니다.우린 행복했지만, 냄새만큼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아버지에게서는 늘 퀴퀴한 검도복 냄새가 났고,손톱에는 남색 물이 들어 있었으니까요.어린 저는 그 냄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오토바이 뒷자리, 해운대에서 문현동까지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 아버지는 사우디와 일본을 오가며 일하셨고 이후 울산 조선소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그러다 가족 중 한 분이 검도복 만드는 일을 하시게 됐고, 아버지는 "가족을 도와야 한다"며 그 일에 뛰어드셨습니다.그렇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옮겨왔습니다.그때부터 아버지의 하루는 오토바이로 시작됐습니다.해운대에서 문현동까지, 매일 그..
우리 집 음악의 역사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들고 온 캐리어에서 시작됐습니다.캐리어 안에서는 전축이 나왔습니다.아버지가 부품을 하나하나 조립하시고 마침내 전원을 켜던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그 큰 소리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그 전축을 시작으로 국민학교 때는 워크맨, 중학교 때는 CD플레이어와 MD,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아이리버 MP3까지.제 십 대는 음악을 담는 그릇이 계속 바뀌던 시기였습니다.지금은 휴대폰에서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세상 모든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그때는 노래 한 곡을 갖기 위해 참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아버지의 캐리어에서 나온 SONY 전축국민학교 시절 우리 집 가보 1호는, 일본에서 건너온 캐리어에서 나온 SONY 전축이었습니다.아버지는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거든요.그 전축..
카세트테이프에 그토록 마음을 두었던 이유를,저는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그 시작은 노래가 아니었습니다.이사를 가던 날, 다락방에서 발견한 낡은 테이프 하나였습니다.그 안에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 우리 가족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예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오래된 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해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그때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울컥하는지 잘 몰랐습니다.이제는 압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소리가 아니라 시간이기 때문입니다.사막으로 보낸 카세트테이프1980년대,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을 가셨습니다.그 시절 중동 건설 현장은 많은 한국 가장들이 가족을 위해 떠나던 곳이었습니다.국제전화는 너무 비쌌고, 편지는 너무 느렸습니다.그래서 어머니가 선택한 방법이카세트테이프를 편지와..
내가 야구팬이 된 건 롯데가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아주라', '마!', 그리고 부산 갈매기.저를 붙잡은 건 경기가 아니라 응원 문화였습니다.여덟 살, 아버지와 이모부의 손을 잡고 처음 밟은 사직야구장.저는 그날 야구를 배운 게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를, 그리고 부산 사나이의 자부심을 배웠습니다.그 여름날의 사직 이야기를 적어 보겠습니다."아주라!" — 여덟 살 인생을 바꾼 파울볼여덟 살, 아버지와 이모부를 따라 처음 사직야구장에 갔습니다.저는 선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습니다.그 당시 사직운동장에 대해 제가 알 수 있었던 건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시끄럽다는 것 두 가지였습니다.그런데 그날, 제 앞자리 아저씨에게 파울볼이 날아왔습니다.아저씨가 공을 잡는 순간, 주변..
"저 선수 죽어라 달리고 있는데요… 아! 아쉽습니다, 역전을 허용했습니다!"그 시절 운동회는 학교 행사가 아니라 마을 잔치였습니다.과장을 조금 보태면 온 동네가 학교 운동장으로 출근하던 날이었죠.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축제였지만, 어른들에게는 학부모 모임이었습니다.부모님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돗자리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며 서로를 익히는 자리였으니까요.다만 제 기억 속 '진짜' 운동회는 4학년까지였습니다.그 이후로는 가족들도 오지 않았고, 예전만큼 심장이 뛰지도, 승부욕이 불타오르지도 않았습니다.만국기 아래 함성이 울리던 그 하루를 적어 보겠습니다.온 동네가 모이던 잔칫날우리 학교, 해동초등학교는 운동장이 아주 넓었고 가장자리에 나무가 많아 그늘이 넉넉했습니다.그래서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들..
제사는 조상을 기리는 의식이었지만 그 의식을 실제로 떠받친 것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요즘 제사 문화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보며, 저는 원망보다 안도에 가까운 감정을 느낍니다.어동육서(고기는 서쪽, 생선은 동쪽),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상차림의 법도는 그토록 엄격했지만, 정작 그 상을 차리는 규칙은 단순했습니다.여자는 부엌, 남자는 제삿상 앞.보수적인 장남의 집에서 일 년에 다섯 번의 제사를 지켜본 아이의 눈으로, 그리고 이제야 어머니의 고생이 보이는 어른의 눈으로,그 시절 이야기를 적어 보겠습니다.일 년에 다섯 번, 장남 집의 숙명우리 아버지는 장남이었습니다.제사를 지내려면 하루 전날 할머니 댁에 미리 가 있어야 했고, 벌초부터 시작해 제사를 마친 뒤에는 온 동네를 돌며..
"밥 무러 온나!"구수한 엄마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리면, 그게 우리 하루의 마침표였습니다.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건 골목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골목을 채우던 '정(情)'이었습니다.부산에서 나고 자란 제가 서울 사는 아내를 만나 서울로 이사를 오고,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이 바로 이 변화입니다.삭막한 골목, 고요한 골목, 이제는 차만 다니는 골목.골목이 놀이터였고 온 동네가 한 가족 같던 우리 세대의 시절과, 학원과 집만 오가는 지금 아이들의 하루를 나란히 놓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골목길에 들어서면, 친구들 집이 다 있었다제가 자란 부산의 골목은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기지 같았습니다.시골도 아니었는데 그 시절엔 아이들이 골목마다 바글바글했습니다.골목에 들어서면 친구들 집이 죄다 거기 있었..
팬시점의 등장은 새로운 자본주의 세상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어수선한 문방구의 시대가 저물고, '취향'이라는 것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저에게 그 변화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로 올라가는 길목 문방구 옆에 처음 들어선 아트박스와 함께 찾아왔습니다.부산 해운대에서 문방구에 둘러싸여 자란 아이의 눈에 그 변화가 어떻게 비쳤는지 적어 보겠습니다.문방구 다섯 개의 왕국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부산 해운대 해동초등학교였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건, 학교 하나를 둘러싸고 문방구가 무려 다섯 개나 있었다는 겁니다.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두 개, 옆 해운대 여중으로 가는 길에 하나, 그리고 초등학교 정문 앞에 두 개.등하굣길 어디로 가도 문방구를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문방구의 왕국이었습니다.그 시절 아이들..
국민학교 다닐 때는 매달 학교에 내는 흰 봉투가 있었습니다.육성회비 봉투였습니다.봉투 하나, 우유팩 하나.그 작은 것들에도 교실의 앞면과 뒷면이 있었습니다.매달 돌아오던 봉투: 육성회비라는 숙제"엄마, 선생님이 육성회비 가져오래요."한 달에 한 번씩 흰 봉투를 받아 왔습니다.봉투에는 학년, 반, 이름을 쓰는 칸이 있었고 그 안에 돈을 넣어 선생님께 내면 됐습니다.그런데 우리 집은 늦게 내는 달이 있었습니다.그날 저녁이면 방문 너머로 엄마 아빠의 전화 소리가 들렸습니다.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습니다.무슨 말인지는 다 알아듣지 못했습니다.그래도 그날은 괜히 먼저 자는 척했습니다.다음 날 학교에 가면 봉투가 든 책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선생님이 아직 안 낸 사람을 찾을까 봐, 친구들이 알까 봐 괜히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