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UTREE.RI · 개인 자료를 다시 쓰는 프로젝트
쌓아 둔 기록을,
다음 일을 위한 자산으로 바꾸는 실험
40대 직장인·육아 아빠가 사진·메모·자료를 세컨드 브레인에 모으고, 그 안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콘텐츠와 디지털 도구 실험으로 확장해 갑니다. 자동화·채널 운영·수익화는 결과를 약속하는 목표가 아니라, 직접 해 보며 배우고 기록하는 과정입니다.
현재 단계: 자료 정리와 세컨드 브레인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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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내가 야구팬이 된 건 롯데가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주라', '마!', 그리고 부산 갈매기.
저를 붙잡은 건 경기가 아니라 응원 문화였습니다.
여덟 살, 아버지와 이모부의 손을 잡고 처음 밟은 사직야구장.
저는 그날 야구를 배운 게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를, 그리고 부산 사나이의 자부심을 배웠습니다.
그 여름날의 사직 이야기를 적어 보겠습니다.

"아주라!" — 여덟 살 인생을 바꾼 파울볼
여덟 살, 아버지와 이모부를 따라 처음 사직야구장에 갔습니다.
저는 선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습니다.
그 당시 사직운동장에 대해 제가 알 수 있었던 건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시끄럽다는 것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 앞자리 아저씨에게 파울볼이 날아왔습니다.
아저씨가 공을 잡는 순간, 주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주라!"
"아주라!"
"아이씨(=아저씨), 뭐하는교. 아주소!"
아이에게 주라는 뜻의 부산 사투리입니다.
결국 아저씨는 무안한 듯 뒤를 돌아, 저에게 그 공을 던져주었습니다.
손안에 들어온 공은 묵직했고, 저는 그날 밤 그 공을 꼭 안고 잤습니다.
이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사촌동생이 그 공을 슬쩍 들고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90년대까지의 '아주라'는 지금과 달리 강요가 아니라 어른들의 자발적인 양보에서 시작된 문화였다고 합니다.
그 시절 사직에는 그런 온기가 있었습니다.
야구공 하나로 아이 하나를 야구팬으로 만드는, 어른들의 여유 같은 것 말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날 이후 야구장을 정말 자주 다니게 됐습니다.
부산 갈매기와 "마!" — 3만 명이 하나가 되는 순간
사직의 진짜 매력은 경기가 아니라, 응원에 있었습니다.
7회쯤 되면 어김없이 부산 갈매기가 흘러나옵니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벌써 나를 잊었나"
3만 명이 목이 터져라 함께 부르는 그 떼창은, 어린 제 눈에는 노래가 아니라 거대한 파도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노래인지 몰랐지만 흘러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게 됩니다.
상대 선수들이 그 위압감에 주눅이 든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직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상대 투수가 1루로 견제구를 던지는 순간, 3만 관중이 동시에 내지르는 짧고 벼락 같은 한 마디.
"마!"
'인마'를 부산 사람답게 한 번 더 줄인 이 한 글자에는 사직의 성격이 다 들어 있습니다.
길게 말하지 않고, 딱 한 방.
원래는 아재들이 견제구가 나올 때마다 제각각 욕지거리를 하던 것이
어느 순간 구호로 정착된 것이라고 하니, 어쩌면 가장 부산다운 응원인 셈입니다.
"마!"
통닭에 맥주, 그리고 닭다리 하나
사직의 응원석 풍경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먹거리입니다.
사직운동장 앞에는 치킨집이 정말 많았고,
요즘 말로 하면 폭리를 꽤나 부렸습니다.
그때는 브랜드 치킨집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치맥'이라는 세련된 말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 사직의 어르신들은 통닭에 맥주를 드셨습니다.
치킨이 아니라 통닭, 크림생맥주가 아니라 그냥 맥주.
그리고 저는 그 통닭에서 나온 닭다리 하나를 들고, 그걸 흔들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습니다.
어른들은 술기운에, 아이들은 닭다리에 취해 함께 소리를 지르던 그 응원석이 제가 기억하는 사직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야구 관람이 아니라 마을 잔치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집에 가는 길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이기면 택시, 지면 버스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그 규칙을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저는 그날의 승패를 정류장에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택시 문이 열리는 날의 그 뿌듯함이란.
어쩌면 제가 그토록 롯데의 승리를 바랐던 건, 야구가 아니라 그 택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사는 지금, 사직의 그 함성이 가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공을 건네주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부르던 그 여름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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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5년 생입니다」 열세 번째 편입니다.
▶ 12편 —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90년대 국민학교 운동회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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