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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생입니다.

[85년 생입니다.] 나에게 IMF란

Grutree 2026. 7. 14. 13:02

목차


    85년 생입니다.

     

    온 나라가 무너지던 그때 우리 집은 오히려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저에게는 오랫동안 이상한 기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중학생이던 제가 겪은 그 시절을,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 서랍장 맨 밑의 금뭉치

     

    1998년 1월, 텔레비전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장롱 속 금을 내놓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랍장 맨 아래 칸에는 통장과 함께 금붙이를 모아둔 자리가 있었는데, 그날 어머니는 그것을 통째로 꺼내셨습니다.

    거기엔 어머니의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야자수가 그려진 사각 펜던트 목걸이였습니다. 어린 눈에도 정말 예뻐서, 저는 지금도 그 모양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 돌반지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들고 우리는 은행으로 갔습니다. 지금은 신세계 메디컬 플라자가 들어선 자리, 그때 그 건물 1층에는 조흥은행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에게 압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시기 전국에서 351만 명이 참여해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고 합니다(출처: 국가기록원). 네 가구 중 한 가구 꼴로 금을 내놓은 셈입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반지를 꺼냈습니다. 우리 집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대한민국이 그랬습니다.

     

    조선업 호황, 남몰래 웃던 산업

     

    그런데 우리 집에는 조금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무렵 다시 조선소에서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원래 아버지의 첫 직장이 조선소였고, 검도복 만드는 일을 그만두신 뒤 본래 자리로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산업이 줄줄이 무너지던 그때 조선업만은 호황이었습니다.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IMF 사태는 결국 달러가 없어서 생긴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소는 선주에게 배값을 달러로 받는 업종이었습니다. 원화 가치가 폭락하니 오히려 천문학적인 환차익을 보게 된 겁니다. 한 언론은 이 시기를 두고 한국 조선소들이 '남몰래 웃었던' 때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출처: 페로타임즈). 온 국민이 달러를 구하려 금을 내놓던 그때, 조선소는 그 귀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덕분에 우리 집은 이 시기에 형편이 오히려 나아졌습니다. 당시는 금리가 살인적으로 높던 때라, 돈을 넣어둘 여유만 있으면 어마어마한 이자의 적금을 들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고금리에 무너지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그 이자를 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도시의 연식 낮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온 나라가 주저앉는데 우리 집만 계단을 하나 올라간 것입니다.

     

    사라진 "한입만" 문화

     

    중학생이던 저는 이 모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매일 기업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1998년 한 달 사이에만 3,300개가 넘는 기업이 도산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일보). 그런데 우리 집은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집은 난리였습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건 학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이 사라졌고, 나중에는 종합 단과 학원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학원을 그만두는 친구가 늘었고, 동네를 떠나는 친구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분식점에 가는 일이 줄었습니다. 가더라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 것만 시켜서, 각자 조용히 먹었습니다.

    그때 없어진 게 하나 있습니다. "한입만~" 하며 친구 떡볶이에 젓가락을 들이밀던 그 문화입니다. 누구도 그러지 말자고 약속한 적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IMF를 뉴스가 아니라 그 사라진 젓가락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아이들끼리 집안 사정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누가 잘살고 누가 못 사는지, 그건 그 시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그냥 조용히 견디고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국가적 위기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겪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우리 집이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저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셨을 뿐이니까요. 다만 저는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은행에 내놓은 야자수 목걸이와 돌반지가 함께 떠오릅니다. 그 마음만은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 저에게 IMF는 그렇게 기억됩니다.

    여러분의 집은 그 시절을 어떻게 건너셨나요?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셨던 분들, 무엇을 내놓으셨는지 댓글로 들려주세요.

     

     

    참고 자료

    국가기록원 'IMF 외환위기 극복':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imf.do

    페로타임즈 'IMF 사태, 성장의 도약이자 몰락의 계기': https://www.ferro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01

    위키백과 금 모으기 운동: https://ko.wikipedia.org/wiki/금 모으기_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