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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생입니다.

[85년 생입니다.]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90년대 국민학교 운동회

Grutree 2026. 7. 12. 21:10

목차


    85년 생입니다.

     

    "저 선수 죽어라 달리고 있는데요… 아! 아쉽습니다,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그 시절 운동회는 학교 행사가 아니라 마을 잔치였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온 동네가 학교 운동장으로 출근하던 날이었죠.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축제였지만, 어른들에게는 학부모 모임이였습니다. 부모님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돗자리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며 서로를 익히는 자리였으니까요. 다만 제 기억 속 '진짜' 운동회는 4학년까지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가족들도 오지 않았고, 예전만큼 심장이 뛰지도, 승부욕이 불타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만국기 아래 함성이 울리던 그 하루를,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온 동네가 모이던 잔칫날

     

    우리 학교, 해동초등학교는 운동장이 아주 넓었고 가장자리에 나무가 많아 그늘이 넉넉했습니다. 그래서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들은 저마다 돗자리를 들고 와 그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운동회는 전날 밤부터 시작이었습니다. "OO 엄마, 내일 거기서 만나요." "뭐 사갈 거예요? 그건 내가 준비할게요." 어머니들의 통화는 운동회 전야의 필수 코스였으니까요. 그리고 당일, 학교 담벼락에는 어김없이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축제 분위기를 만든 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동네 거리 장사꾼들이었습니다. 뽑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군것질거리가 학교 앞에 쭉 늘어섰습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없었습니다. 평소엔 눈치를 보며 사 먹던 모든 간식도 이날만큼은 노 프로블럼이었습니다. 운동을 잘하든 못하든, 운동회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침 개회식과 함께 하루가 시작됩니다. 문방구에서 산 청백 손목띠와 머리띠를 두르고 나면, 그날부터 우리는 더 이상 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청군이거나 백군, 그러니까 라이벌이었습니다. 인정사정 없었죠. 운동장 한쪽에서는 가족 달리기가, 다른 쪽에서는 줄넘기가 동시에 벌어졌고, 확성기에서는 쉴 새 없이 함성과 중계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박 터트리기였습니다. 콩주머니를 있는 힘껏 던져 박을 터뜨리면 색종이가 우수수 쏟아지고, 그 순간의 환호는 지금도 귀에 선합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른들이 참여하는 줄다리기 같은 가족 종목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지막 종목을 위한 전주곡일 뿐이라는 것을요. 자, 이제 대망의 마지막 종목입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둥!

     

    4학년, 그날의 계주

     

    두두두두두두둥! 운동회의 꽃은 언제나 계주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등학교 내내 계주 선수였습니다.

    지금도 가장 선명한 건 4학년 때 그 경기입니다. 저는 청팀이었습니다. 앞선 주자들이 차례로 달리고, 마침내 제 손에 바통이 넘어왔습니다.

    앞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코너 구간에서 발을 헛디뎠습니다. 속도가 뚝 떨어졌고, 그 짧은 순간에 간발의 차이로 백팀에게 추월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던 순간의 그 아득함이란. 짜이찌엔, 사요나라…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군 응원석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저에게 온갖 원망과 욕이 날아왔습니다. 열한 살 인생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저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다음 주자가, 우리 반 아니 청팀 최고의 스타였던 이진영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결국 백팀을 다시 따라잡았고, 청팀은 우승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만약 그날 졌더라면, 저는 아마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조용히 사라져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겼는데도 죄인이 된 기분으로 응원석을 바라보던 그 오후를, 저는 3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만국기가 펄럭이던 그 운동장이 가끔 그립습니다. 여러분은 청군이었나요, 백군이었나요? 그리고 계주에서 역전당해본 사람, 저 말고 또 있나요? 댓글로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참고 자료

    나무위키 운동회: https://namu.wiki/w/운동회
    YTN 90년대 초등학교 운동회 풍경: https://www.ytn.co.kr/_ln/0134_201909231635064595
    한국일보 만국기 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201505130551240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