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85년 생입니다.
카세트테이프에 그토록 마음을 두었던 이유를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그 시작은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이사를 가던 날, 다락방에서 발견한 낡은 테이프 하나였습니다. 그 안에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 우리 가족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오래된 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해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울컥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소리가 아니라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막으로 보낸 카세트테이프
1980년대,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을 가셨습니다. 그 시절 중동 건설 현장은 많은 한국 가장들이 가족을 위해 떠나던 곳이었습니다. 국제전화는 너무 비쌌고, 편지는 너무 느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선택한 방법이 카세트테이프를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공테이프를 사서 갓난아기였던 누나의 목소리를 녹음하셨습니다. 옹알이 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어머니의 목소리를 얹으셨습니다. 아이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컸는지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를요. 그 테이프는 그렇게 사막을 건너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에게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그것이 그 시절 한 가족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테이프를 다시 한국으로 들고 돌아오셨습니다.
이사 가던 날, 다락방에서
세월이 흘러 우리 가족은 2층 전셋집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지난날의 힘듦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올레!"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짐을 정리하던 그날, 다락방에서 낡은 테이프 하나가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사우디에서 들고 오신 바로 그 테이프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재생기에 넣고 틀어보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아주 젊은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우리 아가야. 지금 옹알이를 시작했어."
누나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나 컸는지 사막에 있는 아버지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끝에, 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둘째의 안부까지 전했습니다.
둘째. 그건 바로 저였습니다.
그 테이프가 녹음되던 순간, 저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막의 아버지에게,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들의 소식까지 함께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의 목소리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목소리를 내던 어머니의 몸 안에 제가 있었지만, 저는 그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몇 년이 지난 뒤에야, 저는 그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나오기 전의 나를 만난 셈이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뭉클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테이프의 의미를 조금 더 알게 됐습니다. 그건 단순한 녹음이 아니었습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보내는 일, 그것이 그 시절 테이프가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테이프는 지금 저에게 없습니다. 이사를 몇 번 더 다니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부모님은 그 시절의 물건들을 굳이 챙기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요. 힘들었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으셨던 겁니다. 저에게는 보물 같은 테이프였지만, 두 분에게는 견뎌낸 시간이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끔 사무치게 아쉬울 뿐입니다.
지금은 영상통화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의 얼굴도 볼 수 있습니다.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가벼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사막을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 테이프처럼, 무게를 가진 목소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집에도 오래된 테이프나 사진이 남아 있나요? 우연히 발견한 그것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으신가요? 댓글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85년 생입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85년 생입니다.] 아버지는 검도복을 만드셨지, 야이야이야~♪ (0) | 2026.07.13 |
|---|---|
| [85년 생입니다.] 워크맨과 MP3의 추억 (0) | 2026.07.13 |
| [85년 생입니다.] 부산갈매기 아인교, 사직야구장의 추억 (0) | 2026.07.12 |
| [85년 생입니다.] "역전을 허용했습니다!!!!!!" 90년대 국민학교 운동회 (0) | 2026.07.12 |
| [85년 생입니다.]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 - 제사 (2) | 2026.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