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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생입니다.

[85년 생입니다.] 야반도주가 가능했던 정(情)든 시절

Grutree 2026. 7. 9. 07:11

목차


    85년 생입니다.

     

    계는 은행이 멀던 시절 서민들이 만든 금융 시스템이자 정(情)으로 굴러가던 신뢰의 공동체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 문화가 어린 시절 저에게 가장 신기하면서도, 가장 아팠던 기억입니다. 저희 집이 직접 겪은 이야기와 함께 그 시절 계 문화를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품앗이에서 곗돈으로: 서민들의 금융 시스템

     

    계의 뿌리는 품앗이에 있습니다. 모내기나 김장처럼 혼자서는 벅찬 일을 이웃과 노동력을 주고받으며 해결하던 상부상조의 정신이 돈의 형태로 바뀐 것이 바로 계입니다. 은행 문턱이 높고 대출이 어렵던 시절 그리고 사는 게 바빠서 아침에 출근하면 밤이 늦어서야 귀가 했던 그 시절, 서민들은 목돈이 필요할 때 이 방식에 기댔습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열 명 남짓이 매달 일정액을 모아 순서대로 한 사람씩 목돈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딸 시집보낼 때, 집을 늘릴 때, 갑작스레 병원비가 필요할 때, 계는 그렇게 서민들의 인생 대소사를 받쳐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어릴 적 저 또한 어머니가 다른 아주머니들과 돈을 주고받는 광경이 참 신기했습니다. 통장도, 계약서도 없이 사람 사이의 믿음만으로 그 큰돈이 오간다는 게 어린 눈에는 신기하면서도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거든요.

     

    "중간에 누가 돈을 가져가면 어떻게 되지?"

     

    어린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저렇게 모으다가, 중간에 누군가 돈을 다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 불길한 상상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절에서 인연을 맺은 분과 계를 하셨는데, 모임을 이끌던 한 비구니가 어느 날 곗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해버렸습니다. 통장도 계약서도 없이 믿음으로만 굴러가던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가 터져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일과 함께 보증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머니는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계 문화에서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사고가 바로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 사라지는 '계주 리스크'였습니다. 뉴스에서도 간간이 나오던 이야기였지만, 직접 당해보니 비로소 그 무서움이 눈에 보이더군요. 소송을 걸어도 돈을 돌려받기 어렵다 보니, 저희 집도 그렇게 목돈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뼈아픈 일로 어머니는 제게 두 가지 철칙을 단호하게 남기셨습니다. "절대 보증을 서지 말 것", 그리고 "돈거래는 가족, 친구끼리도 절대 하지 말 것."

    어린 저의 막연한 걱정이 왜 하필 우리 집에서 현실이 되어야 했는지, 그때는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도망친 사람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이야기에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소문 끝에 도망친 그 사람을 찾았을 때,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에 드나들던 한 남자와 정분이 나서 함께 살림을 차리려고 곗돈을 들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도피였고, 저희 가족에게는 굳게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이었던 셈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고, 결국 어머니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일은 어느 한 사람의 악행이라기보다, '믿음'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걸어야 했던 그 시대의 구조가 만든 씁쓸한 비극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전장치라고는 서로에 대한 신뢰밖에 없었으니까요.

    오늘날에는 계모임 전용 통장이 나오고 출금 한도를 제한하는 서비스까지 생겨서, 한 사람이 마음대로 목돈을 빼가는 일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기술이 사람 사이의 불안한 신뢰를 대신하게 된 것이죠. 편리하고 안전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정으로 굴러가던 그 시절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 같아 기분이 묘합니다. 씁쓸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각박해진 덕분에 더는 우리 집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집에도 계와 얽힌 기억이 있으신가요? 좋은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괜찮으시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같은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끼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아니까요.

     

     

     

    참고 자료:

    이투데이 '계주와 곗돈, 계를 아시나요': https://www.etoday.co.kr/news/view/2537630

    나무위키 계(모임): https://namu.wiki/w/계(모임)

    우리역사넷 부녀계의 유형: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3_004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