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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생입니다.

[85년 생입니다.] 독수리 타법의 시초

Grutree 2026. 7. 7. 13:47

목차


    85년 생입니다.

     

    90년대 컴퓨터 학원은 컴퓨터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컴퓨터를 향한 짝사랑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빌게이츠님이 멋진걸 만들었지만 내가 정작 배운 건 타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아이들에게 컴퓨터 학원은 미래로 통하는 문처럼 보였습니다. 1985년생인 저의 첫 컴퓨터, 첫 게임, 그리고 첫 디스켓 복사의 기억을 세 가지 장면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검은 화면에서 왕자가 튀어나왔다

     

    컴퓨터를 처음 만진 건 국민학교 6학년, 친구 집에서였습니다. 친구가 정사각형 모양의 플로피 디스크를 넣고 검은 화면에 cd, dir 같은 알 수 없는 문자를 타닥타닥 치니, 갑자기 화면에 페르시아의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의 탄성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벽돌 성전을 달리고, 점프하고, 칼싸움하는 왕자의 움직임이 당시로선 충격적으로 부드러웠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칼에 베이면 피가 튀는 연출은 어린 눈에 살짝 무서웠지만,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왕자를 보며 '아, 게임에서는 목숨이 여러 개구나'라는 걸 처음 배운 것도 그 화면 앞에서였습니다. 실제로 페르시아의 왕자는 1989년 출시작으로, 세련된 캐릭터 움직임과 살벌한 난이도 덕분에 90년대에 PC를 만져본 사람이라면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던 전설의 도스게임이었습니다. 60분 안에 공주를 구해야 하는 그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저는 그날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친구 집으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한 판 하겠다고 일주일을 기다리던 그 마음을, 뭐든 즉시 다운로드되는 요즘 아이들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집 앞 컴퓨터 학원의 배신: 알고 보니 타자 학원

     

    결국 저는 집 앞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그 시절 컴퓨터 학원은 지금의 코딩 학원처럼 "미래를 위해 꼭 보내야 하는" 학원이어서, 우리 학원에도 한 반에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녀보니 반전이 있었습니다. 빌게이츠의 화려한 기술을 배울줄 알았던 저에게 학원에서 가르치는 건 사실상 독수리 타법의 타자 연습뿐이었던 겁니다. 소나기처럼 화면에서 떨어지는 단어를 받아치는 게임으로 자판을 익히고, 한글과컴퓨터 타자연습으로 분당 타수를 올리는 게 커리큘럼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를 꿈꾸며 등록한 소년에게는 배신에 가까운 수업이였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지루한 타자 연습 덕분에 지금 이 글도 자판을 안 보고 치고 있으니, 인생에서 가장 가성비 좋았던 배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전명 : 디스크를 구하라.

     

     

    그런데 그 학원 컴퓨터 안에는 보물도 있었습니다. 수강생을 더 모으기 위한 원장 선생님의 보물창고 — 바로 게임 디스크들이었습니다. 타자 연습에 지친 아이들을 붙잡아두는 건 결국 게임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원장 선생님 나름의 고객 유지 전략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저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학원 컴퓨터에 있는 게임을 디스켓에 몰래 담아, 일요일에 친구 집으로 가져가는 겁니다.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절대 훔친 게 아니고, 잠깐 빌려간 것이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디스켓 한 장을 품에 넣고 학원을 나설 때의 그 긴장감이란, 지금 생각하면 용량 1.44MB짜리 첩보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시절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도스게임들이 전국에 퍼진 경로 자체가 대부분 이런 식의 복사였다는 겁니다. 정품 유통보다 디스켓 복사로 퍼진 게임이라, 전국의 수많은 국민학생들이 저처럼 디스켓을 품고 골목을 오갔던 셈이었습니다. 저작권 개념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게임은 그렇게 아이들의 디스켓을 타고 흘러 다녔습니다. 다만 이 첩보 작전의 결말은 허무했습니다. 어느 날 '바이러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나타났고, 그렇게 애지중지 모은 디스켓들을 결국 전부 버려야 했으니까요. 골목을 오가며 쌓은 저의 첫 게임 컬렉션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전멸당했습니다.

    검은 도스 화면에 명령어를 치던 그 두근거림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첫 컴퓨터 게임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분당 타수, 몇 타까지 찍어보셨나요? 댓글로 들려주세요.

     

     

     

    참고 자료

    나무위키 페르시아의 왕자: https://namu.wiki/w/페르시아의 왕자
    정원딸린집 90년대 도스게임 정리: https://www.omdroid.com/155
    파이낸셜뉴스 도스게임 아카이브 기사: https://www.fnnews.com/news/201501061039221673